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제 울리케 (문단 편집) === 왕대비 === 1771년 2월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장남 [[구스타브 3세]]가 즉위하면서 루이제 울리케는 왕대비가 되었다. 왕대비가 되고 점점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자 루이제 울리케는 아들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루이제 울리케는 점점 자신을 정치에서 배제시키려는 아들에 실망해 프로이센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둘째인 [[칼 13세|칼 왕자]]의 결혼에 대한 논의가 나오자 루이제 울리케는 자신의 조카와 아들을 결혼시키려 애를 썼다. 일찍이 구스타브 3세가 약혼자를 고를 때도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조카와 아들을 이어주려 했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스타브 3세와 칼 왕자는 이에 반대했고, 칼은 스웨덴의 이익에 따라 약혼자를 골랐다. 루이제 울리케는 분개했고 아들과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1777년에 루이제 울리케와 [[구스타브 3세]]의 관계를 완전히 틀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구스타브 3세의 아내 [[소피 마그달레네|덴마크의 소피아 마그달레나]]가 결혼한 지 12년만에 임신하자 루이제 울리케는 며느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루이제 울리케는 소피아 마그달레나와 한 시종의 관계를 의심하고 아이가 정말 구스타브 3세의 아이가 맞는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매우 어리석은 주장이었는데, 후계자의 정통성이 의심받으면 군주의 자리 또한 위협받기 때문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스타브 3세는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보여주지 않았다. 소피아 마그달레나 역시 고된 시집살이로도 모자라 자신의 불륜과 아이의 출생까지 의심하는 로비사 울리케에게 치를 떨며 두번 다시 시어머니와 상종하지 않았다. 아들과 며느리와의 관계가 파탄난 루이제 울리케는 완전히 정치에서 물러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